박정희가 독립군 도운 군인이라고?

새누리당 이장우,

박정희 비밀 독립군?

 

새누리당 이장우 대변인이 20일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야당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그는 대통령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미화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도입한 것이라는 야당의 비판을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시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실제로 위원회가 편찬한 보고서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은 제외됐습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백강 조경환 선생님께서는 박 전 대통령을 독립군을 도운 군인으로 기억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일이라는 낙인을 찍고 그 업적을 깍아내리기 위해 시작한 노무현 정부의 친일청산 작업은 도리어 당시 열린우리당의 고위관계자, 소속 의원들,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선친에 대한 친일, 탐관오리적 행적 등을 구설수에 올렸을 뿐입니다. 야당이 자신들의 왜곡된 역사관을 고수하기 위해 10여 년 전과 같은 우리르 범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새누리당은 현존하는 어떠한 정당보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를 존중하고 있다는 점을 자신있게 말씀드립니다."

 

 

세계일보에 실린 글,

백강 조경환이 박정희 독립군이라 말해.

확인할 길은 없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립군을 도왔다는 증언은 지난 2004년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이 <세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비롯됐다. 당시 기고글에서 이기청은 임시정부의 마지막 요원이던 백강 조경환 선생님이 들려준 얘기라며 다음과 같이 썼다.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백강 선생을)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길래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소좌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이 글은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이 일자 박근혜 후보측이 반박자료로 사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 담긴 백강 선생의 증언이 실제 존재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실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백강 조경환 선생은 1993년 10월 7일 고인이 됐고, 위 글이 <세계일보>에 실린 것은 2004년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순전히 이기청의 기억에 의존한 것이다. 또한 이기청의 기억이 사실이며, 조경환 선생이 그러한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출처가 불분명한 증언 하나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밀 독립군'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이에 반하는 기록과 증언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독립군이 아닌 출세를 지향하며 일본군에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였다. 기사는 말한다.

 

 

<만주신문>에 실린 박정희,

일본 위해 견마의 충성 다짐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 군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일본)에 충성함 박정희'라고 피로 쓴 반지가 봉입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를 깊이 감격시켰다."

 

<만주신문>은 이 기사와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편지 내용도 공개했는데, 다음과 같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는 이처럼 개와 말과 같은 충성을 일본에 맹세했던 자다. 어디 그 뿐인가. 그의 이력을 보면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출세지향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를 알 수 있다.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삶,

 

지난 8월 <김순종닷컴>에 실렸던 글의 일부다.

 

임관 후 그는 만주군 예하 보병 8단에서 근무한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대한독립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 상해와 충칭 등지를 오가며 자신의 한 목숨을 바칠 때,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조국을 침탈한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던 셈이다. 만주군에 근무하며 그가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일각에선 그가 독립군을 진압하는 '간도특설대'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던 중 1945년 갑작스럽게 광복이 찾아온다.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는 다급했다. 친일파로 손가락질 받고 처단될 것이 두려웠던 이유다. 그는 일본 군복을 벗고 베이징으로 건너간다. 세를 불리고 있던 광복군에 가담하기 위해서다. 광복군에 가담하는 것은 그에게 신분 세탁을 가능하게 했다. 박정희는 광복군에 가담한 후 국내로 돌아온다. 그리고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한다.

 

그가 입교한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대구에서 10월 인민항쟁이 발생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사회주의자이던 그의 형 박상희는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이끈다. 당시만 해도 우파와 좌파의 대립 속에서 좌파가 집권하게 될 것이란 예측이 높았는데, 이 점도 그의 입당을 재촉했다.

 

남로당 입당후 박 전 대통령은 남로당이 군부에 심어놓은 프락치(간첩)으로 활동하게 되고,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된다. 그러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반공을 내세우며 군내 남로당원을 색출 중이었는데, 박정희가 남로당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난 것이다.


그는 체포된다. 고초를 당한다. 그러나 살아남는다. 심문과정에서 군부 내에 존재하던 남로당원의 명단을 죄다 불어준 이유다. 자기 조직의 명단을 다 불어준 사람은 다시 그 조직에 돌아갈 수 없다. 이 때문인지 그에 대한 처벌은 미약했다. 처음에는 무기징역, 이후 다시 징역 10년, 그리고 형 집행 면제로.

 

그는 좌익혐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재가 부족했던 상황 덕분에 육군본부 정보국에 비공식 문관으로 복직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한다. 그는 자리를 옮겨가며,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해가며, 역동의 시기를 견뎌냈다. 그리고 1961년 5월16일 쿠데타에 성공하며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일본 방문한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교장에게 큰절.

 

박 전 대통령이 독립군이 아닌, 일본군이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사건은 1961년 박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박 대통령은 일제 때 만주군관학교에서 천황의 장교들을 길러낸 나구모 신이치로 준장에게 큰절을 올리고 술을 따르며 말했다. "선생께서 이렇게 저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국을 침탈했던 일본군 장교들을 육성했던 나구모 준장에게 이러한 인사를 올리는 박 전 대통령이 '비밀 독립군'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박 대통령이 다카키 마사오 외에도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일본식 이름을 갖고 있는 점도 박정희가 일본에 대한 깊은 충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증명한다. 박 전 대통령은 다카키 마사오라는 말에서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새 이름을 택했기 때문이다.

 

 

 

역사 하나의 관점으로 봐선

안되는 이유 증명한 이장우 의원.

 

이장우 의원이 어제 주장한 것과 달리, 박 대통령은 비밀 독립군이 아닌 '친일파'였다. 확인조차 되지 않은 증언 하나로 친일파가 비밀 독립군이 될 순 없는 일이다.

 

그의 친일적 행적에 대해선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가. 증언 하나로 박 전 대통령이 비밀 독립군이 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증언들도 있다. 물론 이 역시 증언일 뿐, 사실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

 

"계엄선포 한달 전 쯤인가. 박 대통령이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 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다카키 마사오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라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의 동료)

 

최근 국정교과서에 대한 반대여론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국민들이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장우 의원과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에 의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파가 아닌 비밀 독립군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다. 역사는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봐선 안된다. 하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역사는 오류를 남긴다.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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