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성과 관용성, 강대국의 조건

* 이 글은 2016년 3월 9일에 쓰여진 것입니다.

 

ⓒ EBS 다큐 프라임

 

 

강대국이 되기 위한 조건

 

부국강병,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안보가 굳건한 나라를 가리키는 이 말은 국가라는 집단이 탄생한 이래 거의 모든 나라의 목표로 자리해왔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흘러나오는 여러 공약들도 우리나라를 지금보다 풍요롭고 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을 실천해 풍요롭고 굳건한 나라를 만들어낸 정부는 아직 없습니다.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의지는 있더라도 이를 이루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좋은 나라)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있을 순 없습니다. 시대마다 강대국이 되기 위한 조건은 다를 수밖에 없고, 이를 이루어낼 방법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대국들을 돌아보면 우리는 강대국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부국강병을 이루어냈던 국가들, 그들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 EBS 다큐 프라임

 

 

 

스페인 : 종교의 자유를 탄압한 결과, 무너지다.

 

16세기 유럽의 최강대국은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최초의 제국이었습니다. 스페인은 당시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 연안에도 식민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섬나라 필리핀의 이름도 당시 스페인 국왕이던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딴 것이란 점을 볼 때 16세기 스페인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패권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두 나라가 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별 볼 일 없는 변방의 섬나라였던 영국과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5분의 2에 불구한 면적을 가지고 있는 강소국 네덜란드입니다. 그들이 패권국 스페인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6세기 유럽에선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1517년 루터를 시작으로 칼뱅, 크랜머 등의 종교개혁가들은 가톨릭과 교황청의 타락을 비판하며 신교를 만들었습니다. 16세기 신교 진영이 점차 그 세를 넓혀가며 종교전쟁은 시작됐습니다. 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1480년부터 1700년까지 영국은 29회, 프랑스는 34회, 스페인은 36회의 전쟁을 치렀는데, 대부분이 종교와 관련된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국왕이던 펠리페 2세는 "만약 나의 아들이 이교도라면 내가 직접 나무를 날라 아들을 화형에 처하겠다"라고 말할 만큼 가톨릭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슬람 종교 세력의 확장을 막고자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렀고, 신양의 자유라는 기치를 내걸고 신교를 받아들인 여러 나라를 공격했습니다. 네덜란드와 영국도 그 중 하나입니다.

 

스페인은 이들과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에겐 승리하지만 영국과 네덜란드에겐 패배합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점차 패권국의 지위를 잃게 됐고, 영국과 네덜란드는 각각 패권국과 강소국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약소국이던 이들 두 국가가 패권국 스페인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개방성과 관용성에 있었습니다.

 

ⓒ EBS 다큐 프라임

 

 

영국 : 종교의 자유 보장이 기술혁신으로

 

1. 레이스 빌트 갈레온

영국과 스페인의 명망을 가른 칼레 해전에서 영국이 승리한 이유는 기동성이 강한 함선과 함선에 장착된 주철대포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함선은 튼튼하고 안정적이었지만, 빠른 기동성과 화력을 가진 영국 함선에게 승리할 순 없었습니다. 영국이 이러한 장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혁신적 사고와 개방성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의 기동성 있는 함선의 명칭은 레이스 빌트 갈레온입니다. 이 함선은 해적으로 이름이 높았던 드레이크와 그의 사촌 형인 존 호킨스가 발명한 것입니다. 이들 둘은 1568년 아프리카와 서인도 제도의 상품을 교환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신대륙의 황금을 빼돌린다는 혐의로 스페인 함대와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스페인 함대에 패한 이들은 이후 스페인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레이스 빌트 갈레온을 만듭니다.

 

레이스 빌트 갈레온은 혁신적인 배였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자연의 힘인 바람을 이용하는 범선과 인간의 근력을 이용해 노를 젓는 방식의 갤리선을 타고 다녔습니다. 여기서 좀 더 진보된 것이 갈레온 선입니다. 갈레온 선은 배의 선미는 높지만 선수 부분이 낮아 배의 안정성이 높습니다. 안정성이 높은 만큼 더 많은 돛을 달 수 있어 속도 역시 빨랐습니다.

 

레이스 빌트 갈레온은 선수와 선미를 모두 낮추고 배를 날렵하고 길게 만들어 급회전이 가능하게 제작됐습니다. 전투를 위해 상갑판 아래엔 함포들이 들어설 포열 갑판을 확장한 배입니다. 다른 함선보다 빠를 뿐 아니라, 더 많은 포도 장착된 배, 더구나 급회전까지 가능한 함선은 영국이 스페인 함대를 부수는데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2. 주철대포

빠른 기동성을 가진 함선을 개발했다고 해도 당시 가난한 나라였던 영국이 주철대포를 개발하지 못했다면 스페인 함대를 맞아 승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대포는 비싼 물품이었습니다.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청동대포는 특히 더 비쌌습니다. 청동대포의 장점은 대포 발사시 엄청난 압력에도 쉽게 파열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생산량이 많지 않고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청동이 거의 나지 않던 영국은 그래서 주철대포를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헨리 8세는 프랑스의 대포 제조자들을 초대해 수년간 노력한 결과 값싼 주철로 만든 대포를 개발합니다. 이를 통해 영국은 16세기 대포 시장의 70%를 차지할 만큼 큰 수확을 얻습니다. 청동대포에 비해 제작 비용이 1/4 밖에 들지 않던 주철대포는 대량 생산됐고, 다량의 포가 실릴 수 있게 제작된 레이스 빌트 갈레온에 장착됩니다. 이 둘의 만남은 갈레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한데, 영국이 이처럼 배와 대포에서의 혁신을 이루어낼 때 더 많은 물자와 인력을 가진 스페인은 왜 아무런 발전도 하지 못한 것일까요? 사실 펠리페 2세 역시 주철대포를 생산하기 위해 여러 기술자들을 초청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자 중 누구도 스페인에 주철대포 생산 기술을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스페인의 종교재판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비록 신교도지만 가톨릭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탄압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펠리페 2세는 이교도에 대한 종교재판, 마녀사냥, 화형과 고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포 기술자들은 종교적 차이에 따른 탄압을 두려워해 스페인을 방문하길 머뭇거렸고, 이 때문에 스페인은 패권국이라는 지위가 무색하게 신기술 도입에 실패했습니다.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 1세, 두 국왕의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차이는 종교에 대한 관용성과 개방성의 여부였고, 이 차이점은 두 나라 사이의 기술적 진보에 영향을 미치며 두 나라의 미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열쇠가 됐던 것입니다.

 

ⓒ 두산피디아

 

 

작은 나라 네덜란드가 강소국이 되기까지.

 

네덜란드는 예나 지금이나 면적이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경상도만한 면적에 인구도 1600만명에 불과합니다. 17세기에는 인구수가 150~160만에 불과했던 만큼 지금보다 더 가난하고 작은 나라였습니다. 이러한 소국이 스페인에 승리하고 독립을 이룬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하다고 할 만큼 기록적인 사건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강소국이라 표현하기 부족할 만큼 강한 나라였습니다. 17세기 중엽 전 세계의 국제 무역선 중 4분의 3이 네덜란드 선박이었고, 브라질과 남아프리카에 네덜란드인들이 건설한 무역 거점이 존재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일본의 나가사키에 건설된 데지마라는 섬도 그들의 무역 거점이었습니다.

 

16세기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부르고뉴 공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는 스페인의 카를 5세가 다스리던 지역인데,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통치하던 시절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합니다. 독립전쟁의 시작은 펠리페 2세의 악명 높은 종교적 맹신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이야기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펠리페 2세는 가톨릭에 충성하며 다른 종교는 모두 이교로 명명, 탄압했습니다.  

 

네덜란드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가 독립전쟁을 치를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독립을 바라고 전쟁까지 감내했던 것은 펠리페 2세의 종교적 맹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칼뱅에 의해 창시된 칼뱅주의가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이를 묵과하지 않고 칼뱅주의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전역의 종교 문제를 총괄할 주교직을 신설하고 각 개인의 종교생활에 간섭했을 뿐 아니라, 심복이던 알바 공작을 네덜란드 총독에 임명해 신교도를 말살했습니다. 알바 공작은 특별 종교 법정을 세우고 이를 통해 네덜란드 지도자와 신교도들을 말살했는데, 네덜란드인들에게 피의 법정이라 불린 이 곳에선 불과 2년 동안 네덜란드인 1만 2천 명이 재판을 받고, 1천 명 이상이 처형됐습니다.

 

처음에는 종교의 자유만을 바랐던 네덜란드인들은 숨막히는 종교재판의 분위기를 참다못해 무장투쟁의 길로 나아갑니다.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독립 전쟁 중인 1579년 1월 29일 네덜란드 북부 7개 주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선포하는데, 동맹 선언문 창립 헌장에는 종교적 관용에 대한 내용이 명시돼 있습니다. "누구나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누구도 종교를 이유로 심문 받거나 박해 받아선 안된다"

 

종교의 자유에 대한 보장은 향후 네덜란드가 독립을 이루고 강소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오아시스를 찾아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이민자들 때문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아니라, 이민자들에 의해 경제력과 기술력마저 갖추게 되는 이유입니다.

 

 

ⓒ 위키피디아

 

 

네덜란드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얻은 것.

 

네덜란드는 17세기 바다의 마부라는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이는 이주민들과 네덜란드인이 함께 만든, 파격적인 범선 '플류트선' 덕분이었습니다. 플류트선은 속도가 빠르고 건조비가 쌌습니다. 당시 해운업 경쟁국이던 영국에서 동일 크기의 쾌속선을 만들려면 1300 파운드가 들었지만, 네덜란드는 800파운드에 쾌속선인 플류트선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의 화물 운송비 역시 경쟁국들에 비해 3분의 1규모로 저렴했고, 그 결과 네덜란드는 세계 해운업을 평정하게 됩니다.

 

이민자들의 유입과 함께 이루어낸 것은 플류트선의 개발만이 아닙니다. 설탕 산업과 다이아 산업도 번창하게 됩니다. 설탕 산업은 본래 남부의 앤트워프가 중심이었지만,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동한 인력들과 함께 그 중심도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다이아 산업도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은 유대인이 단연 압도적이었습니다. 역시나 종교적 탄압을 피해온 유대인들에 의해 암스테르담은 유럽 다이아 사업의 중심지가 됩니다.

 

유대인의 주력 업종이던 금융업도 발전합니다.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의 아이디어로 동인도회사, 세계 최초의 주식기업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1608년 세계 최초의 증권 거래소가 네덜란드에 등장하며, 17세기에는 1000여명에 달하는 펀드 매니저가 활동합니다. 선물거래나 옵션거래 같은 금융기법도 등장합니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종교에 대한 개방성은 네덜란드가 독립을 이루고 경제적 부국이 되는 것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반면 종교적 자유를 탄압하며 불관용과 폐쇄성으로 일관하던 스페인은 파산을 맞게 됩니다. 금융업과 상업을 담당하던 유대인과 무슬림이 국외로 빠져나가자 이들 산업이 몰락했고, 산업의 공동화라는 대가가 찾아온 이유입니다.

 

로마, 몽골, 미국도 다르지 않다.

 

비단 영국과 네덜란드만이 아닙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대국들은 모두 개방성과 관용성이라는 기치 아래 성장했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장군과의 전투에서 연거푸 패배하면서도 그들을 지지해준 동맹 도시국가들에 의해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이는 로마가 그들의 이웃에게 로마 시민권을 나눠주고, 심지어 로마 최고 통치권을 맡기는 등의 개방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이은 로마의 패배에도 이러한 로마의 개방성은 동맹 도시국가들이 로마를 저버리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됐습니다.

 

몽골 역시 때론 피정복민들을 유린하기도 했지만, 저항하지 않는 피정복민들에겐 관용을 베풀었고 그들의 전문성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대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는 이질적인 민족과 종교가 한데 어우러져 살았던 것도 몽골의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현재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도 그러합니다. 건국 초기 그들은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가진 이민자들을 모두 수용하는 개방성을 보였고, 미국이란 국가의 이름 아래 이들이 융합되고 섞여가는 과정을 통해 강대국으로 성장해왔습니다.  

 

ⓒ 뉴시스

 

선진국이 되겠다고?

 

살펴본 것처럼 한 나라의 개방성과 관용성은 강대국이 되기 위해 '필요조건'임이 분명합니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들 중 개방성과 관용성을 보인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나와 다른 이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불순세력이라 치부한 자들, 폐쇄적인 사고에 익숙한 자들이 오히려 많았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국가들은 그들 국가에 살아가는 국민은 물론 타민족에게도 관용성과 개방성을 보여줬습니다. 선진국이 되길 갈망하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연일 나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어떠한 집단을 개인을 비판하기에 바쁘진 않던가요. 지금 우리의 모습은 개방성과 관용성을 통해 성장한 영국이나 네덜란드가 아닌, 폐쇄성과  불관용성으로 일관하다 몰락을 맞이한 스페인을 닮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우리 대한민국이 당분간 '아시아의 강소국'이 되기는 힘들 듯 합니다.

적어도 향후 2년간은 확실히 그러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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